About Philosopaws
동물을 키우는 것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Philosopaws는 동물을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를 넘어, 서로 다른 생명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기록합니다.

호두는 집 안에서 소변이나 배변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 세 번, 대략 여덟 시간 간격으로 호두와 밖에 나가야 한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나에게 그 시간은 산책이라기보다 하나의 일이었다. 호두가 배변할 때까지 동네를 돌아다니고, 목적을 달성하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호두를 돌보고 있었지만 산책의 목적과 방식은 사실상 내가 정하고 있었다.
충북의 한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한 뒤 조금씩 달라졌다.
집 주변에는 풍광이 아름다워 매일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길이 많았다. 어느 날부터 나는 산책길을 내가 정하지 않고 호두가 가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호두는 길을 선택했다. 어느 곳에서는 냄새를 오래 맡았고, 어떤 갈림길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산책은 배설을 위한 배회에서 ‘탐색’으로 바뀌었다.
호두가 그 변화로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동물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를 인간인 내가 정확히 측정할 수도 없다.
다만 나를 이끌며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호두에게 이전보다 조금 더 충만한 삶을 만들어 줬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도 달라졌다.
내가 원하는 길을 걷지 않았지만 산책은 더 즐거워졌다. 호두를 따라 처음 가보는 길로 들어가고, 호두가 멈추면 나도 멈춰 주변을 바라보았다.
호두의 산책이 탐색이 되면서 나의 산책도 탐색이 되었다.

잘 돌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반려동물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돌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료를 사고, 병원에 데려가고, 깨끗한 잠자리를 마련하고, 매일 밥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개에게는 개로서 원하는 것이 있고 고양이에게는 고양이로서 원하는 것이 있다. 같은 고양이라도 성격과 경험에 따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다.
그것을 무시한 채 인간이 생각하는 좋은 삶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제공한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정성껏 돌본다 해도 그 돌봄의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만이 남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동물에 대한 존중은 거창한 철학적 명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과 다른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동물이 가진 본능과 욕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한 개체가 가진 성격과 의사를 세밀히 살피고, 가능하다면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그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들에게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존중이며 예우이리라.
존중한다고 원하는 것을 모두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호두가 원하는 산책길을 가능한 한 따라간다.
하지만 호두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우리 집의 동물들에게 사람의 음식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먹고 싶어 해도 건강에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은 제한한다.
아이가 아픈 것 같으면 병원에 데려간다. 병원의 묘한 기운을 느껴 공포에 떨고 치료에 온몸으로 저항하더라도 그때만큼은 그 의사를 무시한다.
현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칸트와 후쿠도 내보내지 않는다.
집 밖의 아기 고양이를 보고 달려가고 싶어 하는 호두의 행동도 막는다.
그 순간 나는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보호이고 어디부터가 지배일까.
이 질문에는 아직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 자체에 이런 모순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집을 정하고, 먹을 것을 정하고, 밖에 나갈 수 있는지를 정하고, 병원에 갈 것인지까지 결정한다. 우리가 아무리 그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이 관계에서 인간이 훨씬 많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곳에서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건강이나 안전처럼 대신 판단해야 하는 순간에는 개입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 물어야 한다.
길고양이들은 질문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집 주변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하루 세 번 먹이를 제공하고 우리 집 앞마당을 안전한 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말 그들을 돕는 것인지 가끔 고민한다.
내가 그들의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에 너무 깊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집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 새끼 고양이에게 특별히 영양식을 주고, 심한 눈병이나 상처를 발견했을 때 치료에 개입하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할까.
고양이들이 늘어나 주민들과 갈등이 생길 가능성을 생각하며 TNR(길고양이 포획·중성화·방사)을 고민하는 나의 행동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때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도 든다.
내가 그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고통받는 동물을 바라볼 때 생기는 나 자신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연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공존
그래서 내가 말하는 공존은 인간과 동물이 완벽하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이루는 어떤 아름다운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현실의 공존에는 충돌이 있다.
동물에게는 본능과 욕구가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생활이 있다. 건강과 자유가 충돌하고, 안전과 본능이 충돌한다. 때로는 한 마리의 동물을 돌보는 일과 주변 사람들의 생활이 충돌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좋은 공존은 어느 한쪽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의 본성과 개체의 성향을 가능한 한 존중하면서, 인간 역시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점을 계속 찾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가진 더 큰 결정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공존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물을 돌보면서 내가 배운 것
나는 처음에는 내가 동물들을 돌본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매일 밥을 주고, 산책하고, 청소하고, 병원에 데려가고, 그 모든 비용과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인간인 나다.
그런데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반대 방향의 변화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행복해 보일 때 나도 행복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 역시 조금 달라졌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원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경험은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도 조금씩 영향을 미쳤다.
다른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예전보다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에도 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이유와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나는 동물들과 살면서 좀 더 평화로운 사람이 되었다.
Philosopaws에서 계속 묻고 싶은 것
Philosopaws에는 앞으로 동물과 함께 살면서 겪는 많은 이야기가 기록될 것이다.
먹는 것과 건강, 행동과 돌봄, 산책과 놀이, 길고양이들과의 만남, 때로는 제품과 생활에 관한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밑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생명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앞으로도 완전한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호두가 오늘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 바라보고, 고양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하고, 내가 그들에게 하는 일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인지 다시 묻는 일은 계속할 수 있다.
Philosopaws는 정답을 선언하는 곳이라기보다 그 질문을 실제 삶 속에서 계속 확인해가는 기록이 되었으면 한다.
동물을 키우는 것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